2003년 2월에 우리집에 왔던 말티즈는 2018년 추석에 세상을 떠났다.
생명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죽음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는 사실은 조금 힘이 드는 일이었다.
잠깐 밖에 다녀온 사이에 개가 죽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시원섭섭'이라는 단어를 쓰며 누워 있는 개를 쓰다듬었었다.
아직은 따뜻했었다.
불과 몇시간 전에 내 배 위에 눕혀 놓고 쓰다듬어 주면서 시간을 같이 보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된 것이 이상하고 어색했다.
개는 우리집에 오면서 이름이 생겼다. 하나의 이름이 생겼고 그 이름은 그 개를 부르는데 쓰였다.
촌스러운 이름이었지만 그 이름을 부르면서 형이 되고 누나가 되고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었었다.
그렇게 15년을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지내왔다.
사람 처럼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눈치라는 것은 사람도 있었고 개한테도 있었기에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살아 왔던 것 같았다.
사람에게도 여러 성장 단계가 있듯이 개한테도 여러 단계가 있었던 것 같다.
까불거리던 시기도 있었고 의젓해지는 시기도 있었다.
제일 재미있고 귀여운 시기는 그 강아지부터 어느 정도 까불거리면서 크는 그 시기가 사람한테는 제일 키우는 맛이 있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어디 놀러 다니고 활동적이지 않은 우리집 분위기 탓인지 개는 잠을 많이 잤었다.
나 또한 유일하게 개와 할 수 있던 일은 자고 있는 개를 깨우는 일이거나 같이 자는 일이었다.
그렇게 개도 나이를 먹었고 나도 나이를 먹었다.
개의 털은 윤기도 점점 없어졌고 색깔도 점점 빠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보고 있으면 예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개들은 나이가 수명이 짧기 때문에 늙어가는 것이 쉽게 보인다.
그 나이듦은 눈에서 제일 먼저 보여진다.
검었던 눈동자는 뿌옇게 변해진다.
그 눈을 보면 이제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평생 살아왔던 공간을 더듬거리면서 잘 찾아 다니는 개를 보면 사람보다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 내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저렇게 자신있게 돌아 다닐 수 있을까....
그렇게 잘 찾아 다니던 개가 점점 혼자만의 세상을 돌아다니게 되는 순간이 왔다.
어디를 가는지 한쪽 구석에서 방향을 잃거나 혼자서 돌다가 넘어져서 못 일어나거나 지쳐서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앙칼진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난다.
사실 목소리를 잊어버렸다고 하는게 맞는 것 같다.
개는 점점 먹을 것을 못 먹기 시작했다.
그나마 뭔가 먹을 때는 그래도 살아가겠지 하는 작은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먹는 것을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게 해줬다.
그 후로 버릇이 하나 생겼다.
자고 있는 개를 조용히 관찰하는 버릇이었다.
숨은 쉬고 있나...?
하나의 바람이 있었다면 혼자 외로운 죽음을 맞게 해주면 안되겠다는 바람이었다.
죽음을 막거나 같이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옆에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개는 아팠는지 깨갱 거리는 소리를 종종 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너무 반가웠다.
저녁때 짖어대면 구박했던 그 목소리였는데 한동안 그리웠던 목소리였다.
하지만 친척의 얘기에 따르면 오래 키우던 개가 깨갱 거리면서 짖고 난 뒤 얼마 안 있다 죽었다고 했다.
그 그리웠던 목소리는 이제는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던 것 같았다.
힘없이 매일 잠만 자던 개가 얼마나 아팠기에 있는 힘을 쥐어짜면서 소리를 냈을까...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단지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 밖에 없었다.
추석날이었다.
개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누워 있는 나는 개를 내 배 위에 눕혀놓고 쓰다듬고 손발을 주물러 주고 있었다. 차가웠던 손발은 조금 미지근해졌다.
개와 나의 공유 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시간이 마지막이었었다.
한두 시간 나갔다 오니 개는 죽어 있었다.
슬픔보다는 '시원섭섭'했다.
아파서 앓고 있는 개에게는 이제 아픔은 존재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말들은 죽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하는 위로의 말과 같았다.
죽는 그 순간의 그 상황과 고통 감정 이런 모든 것들은 죽어 가는 생명만 알테니까...
어쨌든 15년 넘게 같이 살아온 그 개는 거실에 자는듯이 누워 있었다.
최근 항상 그래왔듯이 죽은듯이 자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아니...이제 자는 듯이... 죽어 있었다.
불러도 소용 없었다.
어루만져도 소용 없었다.
더 잘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상대적인 것이며 한계가 정해져 있지도 않고 측정도 하기 힘든 것이었다.
예전에 10여년 전에 10년 넘게 키우던 개를 보낼 때와 느낌이 조금 달랐다.
나도 그 사이 감정이란게 무뎌진 것 같았다.
슬프지 않았다.
오랫동안 잘 먹지 못했고 잘 움직이지 못했던 그 개는 나를 그 개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천천히 무뎌지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추석 다음 날 우리 가족 나름의 정성과 예의를 갖춰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리고 혼자 거실에 앉아 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몇분을 울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여러 복잡한 생각과 감정이 머리를 채웠다.
태어나면 죽는게 당연한 것이지만 남은 사람에게는 아쉬움이 따르고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남는가 보다.
눈물은 그렇게 멈췄고 나의 일상은 그 개가 있을때와 없는 지금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 흘렀다.
집에 들어오면 그 개가 누워 있을거라는 생각의 습관에 따라 나도 모르게 그개를 찾는 나를 발견한다.
어딘가에 죽은듯이 자고 있을 것 같은데.... 찾아보면 없다.
그래도 그렇게 자고 있을 때가 좋았는데....그때가 좋았는데...
이런 시간이 얼마간은 반복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비어있는 공간이 익숙 해질 것 같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잊으며 적응하며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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